인어공주

이번 역삼동 ‘하나 둘 갤러리’ 에서 진행되고 있는 ‘SUMMER SENSATION ON °C‘ 가 기획 단계에서 ‘여름’을 주제로 정해졌을 때 저는 디즈니 첫 장편 애니메이션인 ‘인어공주’가 떠올랐습니다. 왜 주제가 여름인데 인어공주가 떠올랐냐 묻는다면 여름이면 바다고 바다면 인어공주고 하는 제 의식의 흐름을 핑계로 댈 수 밖에 없겠네요.

여하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았을 너무나 유명한 인어공주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로 최근 다시 제작이 되었는데 주인공이 흑인인것에 대한 논란이 일어 흥행에 실패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딱히 그 영화를 영화관에 가서 보진 않아서 정말 흑인이 흥행 실패의 주요 요인인건지 아니면 허술한 연출력이나 스토리가 문제인건지 판단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원작 애니메이션이랑 꼭 그대로 갈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흑인이 인어공주일 수도 있고 라티노가 인어공주 일수도 있고, 동양인이 인어공주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 동양인이 인어일 수도 있지 않나?

제 이번 작품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제가 근래에 보았던 한 전시회의 기억과 맞물리게 되었습니다.

인어공주

그것은 제주도민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기억인 4.3 을 주제로 한 박경훈 작가의 판화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님은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를 중심으로 예술가, 사회운동가,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오래동안 금기시돼온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처음엔 광주비엔날레를 관람하다가 근처에 있는 시립미술관까지 들러보자 하고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그렇게 관람하게 된 작가님의 판화 작품들은 그동안 4.3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데 매진하셨다는 그 세월과 열정과 마음이 작품 하나하나 강렬하게 녹아있어 전시를 마치고 나올 땐 왠지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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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 작품명 그럼에도 밭을 일구다
  • 작가명 박경훈
  • 제작년도 2022
  • 규격 68x200cm
  • 재료 한지 위에 목판

그래서 그랬을까요. 여름이 생각나서 바다가 생각나서 인어공주가 생각나고 제주 4.3 사건을 표현한 작품들을 보니 머리속에 이런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무도 없는 제주 밤바다에 제일 큰 달이 뜨면 귀신인지 뭔지 모를 존재가 축 젖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마을 근처 바닷가에 나타난다는 전설이 전해져와. 술취한 하루방이 봤는지 마실 갔다 온 할망이 봤는지. 바윗터에 앉아있는 그것은 인기척만 보이면 퐁당하고 바다속으로 들어가버린단 말이여.

그 것은 저 파란집 옛날 어멍이 너만은 살으라 바다로 보낸 순이였을까. 아니면 그 날 물질하러 갔다가 여태 못돌아온 동식이 누이였을까. 아니면 아방,아시,하루방,할망 다 잃고 미쳐서 검푸른 제주바다에 몸 던진 누군가의 어멍이였을까. 누군진 모르겠지만 너무 억울해서 다시 오는 가봐. 너무 보고 싶어 다시 오는가봐.

저는 그렇게 억울하게 가버린 누군가의 누이, 누군가의 어멍, 누군가의 딸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인어공주

옛날 제주 해녀가 물질할 때 입던 옷을 입고 물안경을 머리에 쓰고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 제멋대로 바다속에서 너울거리는 인어공주처럼 붉게 물든 머리칼. 색색이 변하는 바다 속 반짝거림은 끝내는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의 마지막 운명처럼 그네들의 운명과 닮아있음을, 참으로 어여쁘던 그들이 철 지나면 져버리는 동백꽃, 유채꽃처럼 그렇게 짧게 스러져버렸다는 것을요.

남들에게 쉬 말할 수 조차 없는 비극적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제주에는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가족들과 연인과 저마다의 행복한 시간을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합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모두다 제주에서 행복한데 굳이 그 고통스러운 기억의 상자를 꺼내들어야 하냐고요.

그래도 가끔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손가락에 피를 내면서 까지 파내어 만든 작품을 통해 알리고 싶었던 그날의 기억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이렇게 또 다른 작품을 만들고 또 누군가는 이 글을 통해, 작품을 통해 다시 또 그날을 기억한다면 이 모든 행위들이 이젠 제주를 지키는 인어가 되어버린 우리 누이, 우리 딸, 우리 어멍의 넋을 기리는 일이 될테니까요.

인어공주

저 스소SOOSO 작가의 4.3 에 대한 생각을 여름, 그리고 인어공주 라는 이야기와 함께 표현한 작품 <인어이야기> 는 ‘하나 둘 갤러리’ 에서 도씨 작가님들의 여름을 주제로 한 작품들과 함께 전시 중입니다.

  • 기간: 7월 17~29일
  • 위치: 강남구 논현로 542 금석빌딩 1층
  • 영업시간: 평일/오전 9시~오후 6시 토,일요일휴무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많은 관심과 방문 부탁드립니다.

생각해 보니 근래에 제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전시하는 작품들은 담고 있는 이야기가 대부분 좀 슬픈거 같아요. ;; 인도네시아 코끼리 이야기도 그렇고 ^^;; (보통은 에스파 카리나 뉴진스 뭐 이런거 그리기도 하지만) 다음에는 좀더 몽글몽글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그림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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